인터뷰: 아시아 페이퍼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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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시아 페이퍼카메라

말레이시아 출신 작가이자 사진가인 Tan Lee Kuen씨가 운영하는 아시아 페이퍼카메라는 매주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의 인터뷰와 작업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세월호 작업에 대한 인터뷰가 실렸고, 번역본을 공유합니다. 인터뷰는 2015년 12월에 진행되었습니다.

Time stands still at classrooms once occupied by the Sewol student victims. Flowers, treats and mementos are laid on the writing desks of the victims. Empty desks belong to survivors. Out of 325 students onboard, only 75 escaped the capsizing ferry and no one else was rescued.

‘세월호, 그 후’ 작업 중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건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한국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준수는 주목받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인권문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거나, 소외되고 외면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2015 파리사진상은 세월호 참사와 유족들에 대한 장기 작업을 해온 그에게 은상을 수여했다.

To press independent inquiry, about 70 bereaved Sewol parents shaved their heads. Kim and a few other parents started camping out at Gwanghwamun again, this time without any tent or canopy.

‘세월호, 그 후’ 작업 중

Q. 우리가 2014년 앙코르 사진축제에서 만난 이후로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냈던 것 같다. 지난 한 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A. 앙코르에 갔을 때, 나는 한국에서 일어났던 선박참사의 유족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올 해 상반기에 기사가 나갔을때 굉장한 안도감을 느꼈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그들을 실망시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Q. 어떻게 기사가 나가게 됐나?

A. 다른 어싸인먼트를 통해 독일인 기자를 한 명 알게 됐다. 참사 1주기가 다가올 무렵, 그가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했다. 내가 1년간 세월호 작업을 해왔다고 말하자 큰 관심을 보였다. 작업의 주요인물인 유민아빠 김영오 씨에게 소개했고, 인터뷰 통역까지 도왔다. 일요판 신문에 기사가 아주 크게 실렸는데 정말 뿌듯했다. 기사를 전달받아 액자 두 개를 맡겼고, 하나는 고생한 내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김영오씨에게 선물했다. 내겐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세월호 작업을 통해 조금씩 기회가 생겼고, 에디아담스 워크숍에도 합격했다.

April 2015, just a few weeks before the 1st anniversary, the government proposes the enforcement decree of the Sewol law, which undermines the very independence of the investigative committee. The Sewol families are outraged. Some 70 parents shave their heads in protest, and about 150 parents embark on a 2-day walk protest wearing mourning white dress and holding their children's funerary portraits. A victim's mother and sister lean on each other just before the march began.

‘세월호, 그 후’ 작업 중

Q. 참사는 304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그 중 대부분은 어린 학생들이었다. 조심스럽고, 힘들고, 감정이 격해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어떻게 접근했나?

A. 개인적으로 참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고 이틀 째 사진가가 아닌 미국공영 라디오방송 NPR의 통역으로 진도에 내려가게 됐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목격한 것들이 잊혀지지 않았다 – 사랑하는 이들의 생환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 말이다. 하지만 구조작전은 성과가 없었고, 실종자 가족은 곧 유가족이 되었다. 사고 초기에 진도에서 무능과 방치 내지는 무반응(inaction)를 목격했는데, 그런 기조가 지난 1년간 계속 반복됐다.

통역 일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진을 즉각적으로 많이 찍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나았다고 본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억지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들과 더 공감하고, 시간을 보내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내 나름대로 관찰해보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한, 두 달 정도면 상황이 정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하고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조사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상황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유족들은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답을 찾기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세월호는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었다.

가족들은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언론과 관계된 사람들을 불신했기 때문에 신뢰를 쌓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취재한 첫 번째 참사였고, 처음부터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 언론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유족들의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아주 크고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공감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져갔다. 그리고 희생자의 숫자가 단순 통계화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깊숙히 들어가서 참사에 사람의 얼굴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 무렵 유민아빠 김영오 씨를 만났다. 그는 결국 46일간이나 단식을 했는데, 누가 그렇게 오래할 줄 알았겠나. 불굴의 의지와 고인이 된 딸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가 유족 사이에서도 유명해지자, 나는 ‘유민아빠를 찍는 사진가’로 알려졌다. 거기서부터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고 가족분들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유족들은 이미 카메라를 들고 있거나 언론과 관계된 사람들을 불신했기 때문에 신뢰를 쌓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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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 후’ 작업 중

Q.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훨씬 지났는데,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A. 세월호 참사는 배가 침몰하고 1년 8개월이 지난 2015년 12월에야 첫 번째 청문회를 열게 되었다. 책임회피는 물론, 정의와 진실을 갈구하는 유족들의 요구를 임막음하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한국 정부는 진상조사 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했고 가족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여론도 악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유족에 대한 연민을 잃었다. 아시아에서는 권위와 체제에 대한 굴종이 심한 듯하다. 유족들은 아직 마음의 안식과 사건의 종결을 얻지 못했다.

Q. 당신은 어떤가?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나?

A.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의 접근방식이 뉴스의 기록에 가까웠다면 지금부터는 조금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싶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벽에 부딪힌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맥락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이야기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풀어내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다큐작업이란 때로는 설득과 협상이고, 때로는 오래 머무르면서 끈기있게 기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그 후’ 작업 중

Q. 올해 주요 워크숍 두 군데에 참석했다. 파운드리 포토저널리즘 워크숍에서 존 스탠마이어에게 배웠고, 뉴욕의 에디아담스 워크숍에도 참석했다. 워크숍에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가?

A. 그동안 너무 크고 심각한 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파운드리에서는 앵글을 좁혀 작고 친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게스트하우스 근처의 작은 식당을 찾았고 그 곳에 대한 작업을 했다. 존(John Stanmeyer)과의 시간은 정말 좋았다. 그는 아시아 사진가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도와주고 싶어한다. 나에겐 대부(godfather) 혹은 삼촌같은 존재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더 시적으로 표현하고, 은유와 조형미를 실험하도록 나를 독려했다.

에디아담스 워크숍은 커뮤니티와 나눔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사진가들은 고립된 집단이 되기 쉽고, 우리는 쉽게 수줍어하거나 내성적이 된다. 작업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거나 논의하는 것도 주저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 모든게 경쟁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에디아담스에서는 나눔과 동료애,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인식이 있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명한 사진가들과 에디터들은 자신의 시간과 지식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나도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들을 따라 후배들에게 더 나누고 기여하고 싶다. 받은만큼 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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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산 와룽’ 작업 중

Q. 어떻게 사진을 직업으로 선택하게 되었나? 

A. 항상 예술 쪽에 관심이 있었다. 어릴 때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커가면서 음악활동도 많이 했다. 아마 공감하겠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 외아들로 자라는동안, 우리 부모님은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고 내가 변호사나 의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당신이 창의적이거나 예술적인 사람이라면, 그걸 부인할 수 없다. 그 기질을 거슬러 갈 수 없다, 안 그런가? 대학을 다니면서 처음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Q. 영문학 전공자로서 문학과 사진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A.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그 때 당시에는 언어적 감각이 더 발달해있었다. 추후 사진을 알게 되었고 시각적인 언어로서 사진이 가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힘에 매료되었다. 그때부터 줄곳 다큐멘터리 사진이 가진 힘을 탐구해왔다. 영문학 배경은 사진을 하면서도 도움이 된다.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스토리텔링인데, 언어나 시각의 형식에 상관없이 수 많은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는다. 최근에는 이 모든 시각적, 언어적 요소를 합치고 청각적 경험까지 더해 멀티미디어 작업을 하는데 관심이 간다. 그렇게 하면 좀 더 깊고 고차원적인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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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산 와룽’ 작업 중

Q. 캐나다에서 살면서 공부했던 경험이 한국에서 작업하는 방식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

A. 몇몇 외신기자 친구들은 내가 내부자의 지식과 외부인의 시각을 가졌고 그게 큰 이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언어문제도 없고, 한국사회도 비교적 잘 안다. 그게 스토리를 찾고 앵글을 좁히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Q. 지금은 서울에 베이스를 두고 있고, 한국에 대한 작업을 많이 하고 있는데?

A. 항상 갈등하고 있다. 한국에서 탐구하고 기록하고 싶은 주제들이 참 많은데, 한편으로는 아시아나 세계 레벨에서의 큰 주제, 공감하기 쉬운 주제를 다뤄야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낀다. 아시아 사진가들은 모두 비슷한 압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적인 매체를 통해 인정받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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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조각들’ 연작 중

당신은 자영업자이고, 사진의 비즈니스(business) 측면을 어떻게 접근하고 관리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Q. 한국 사진시장은 어떤가?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입장에서 말해본다면?

A. 개념사진이나 예술사진가들에게 더 유리한 것 같다. 작업을 해도 그걸 소화해줄 수 있는 매체시장이 없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겐 상당히 힘든 곳이다. 나도 외국의 매체시장으로 방향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독일 쪽과 일할 수 있어서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다. 대우도 좋고, 결제도 제 때 해주고, 출판시장도 활성화 되어있다. 사진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후로 내 목표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만으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매체는 이미 상근직 사진기자를 데리고 있고, 프리랜서에게 일을 거의 주지 않는다. 패션잡지랑 일하는게 아닌 이상 독립사진가와 일해본 경험을 가진 매체도 드물다. 세월호 작업도 한국매체에는 거의 실리지 못했다.

대신 코리아 엑스포제라는 플랫폼을 가지고 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에 대한 기사를 한 번 싣고나서, 글 쓰는 친구와 의기투합해서 함께 운영중이다. 포토에디터와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웹사이트 관리도 돕는다. 그 곳에 사진을 종종 싣지만, 한국의 문화와 정치 등을 다루는 영문 온라인 잡지이다보니 한국어 독자들을 위한 매체는 아니다.

영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블로그를 시작할까 생각중이다. 한국어 독자들과 더 소통하고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를 느낀다. 사진에 숨어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어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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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조각들’ 연작 중

Q. 독자들과 교류하고 작업을 보여줄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다는 얘기인가?

A. 오늘날 사진가들은 전통적인 방식보다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 물론 기록자나 저널리스트로서 지켜야할 선은 분명히 있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내 생각에 개인작업은 커리어를 진전시키는데 분명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작업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고,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파운드리와 에디아담스에서 내가 얻은 중요한 교훈 한 가지는 사진 역시도 비즈니스(business)라는 것이다. 당신은 자영업자이고, 사진의 비즈니스 측면을 어떻게 접근하고 관리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 생각에 아시아의 사진가들은 마케팅이나 홍보를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신념을 버리는 것”이라던가 심지어 “영혼을 파는 행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한다는 건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다. 당신을 홍보하는게 아니라 당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그들을 위해 홍보하는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와 대의를 전달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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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조각들’ 연작 중

Q. 새해에 계획이 있다면?

A.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2016년에는 삶을 좀 영위하고 균형을 추구하고 싶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얘기다. 경력이나 작업에 대해 너무 큰 야망이나 목표를 갖고 싶진 않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면서 깨달은 건, 억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때와 장소가 있더라. 최선을 다하고, 취재원들과 시간을 보내고, 최선의 결과를 바랄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간 작업을 하고 경력을 쌓느라 가족, 친구와의 관계를 등한시했다. 사진가로 살다보면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방치하기 쉬운 것 같다. 경력과 인생 모두 성공적으로 관리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한 사진가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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