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싸움

제가 기록한 세월호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사진 다섯 장이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 벨트(Die Welt)의 일요판 벨트 암 존탁(Welt am Sonntag)에 실렸습니다. 벨트 암 존탁은 독일의 일요신문 중에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기사 전문을 옮깁니다. 번역에 힘써주신 허은선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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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벨트지> 2015년 4월12일 기사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투쟁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 넘게 희생됐다. 김영오씨의 딸도 이들 중 한 명이다. 사고 당시 김씨의 딸은 열일곱 살이었다. 참사 이후 아버지 김씨는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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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오씨가 결혼식장에서 막 돌아왔다. 친구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양복이 헐거워보였다. 분명 예전엔 김씨의 몸에 꼭 맞았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봄이다. 한국에서 봄이란,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를 연인들이 걷는 계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씨는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야 가까스로 미소를 보였다.

“여자 옷가게에서 일할 때였어요. 역 주변에 흔한 중저가 의류점이었죠.”

“그녀가 들어와서 옷을 입어보더라고요.” 김씨가 말했다. “제가 그 옷을 선물할테니 나가서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했죠.” 그리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그들은 결혼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그녀는 이미 만삭이었다. 임신 8개월째였다. “옷으로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했어요.” 김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1997년 1월14일, 꼬박 하루가 걸린 난산 끝에 드디어 유민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18년 뒤, 유민이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 근처 묘지에 묻혔다. 유민이가 다녔던 교실은 이미 일년전부터 추모를 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같은 층 다른 교실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월호 탑승 승객 476명 중 약 300명이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사고 당일 해안 경비대가 조난 신고를 받은 것은 아침 9시경, 그러나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날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자가 304명에 달하는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김영오씨(48)는 지난 몇 달 동안 다른 세월호 희생자 학부모들과 함께 정부에 진실을 요구하는 데 앞장섰다.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연대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은 이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징표가 됐다. 김씨는 종종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도에 인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국에는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법이 있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 즉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 통치하던 유신 정권 시절의 잔재다. 그러나 김영오씨는 현 대통령의 이름 박근혜, 세 글자를 또렷이 말했다. 이어 김씨는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이 길 위에서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을 다시 한 번 던졌다.

-사고 당일 세월호는 어떻게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않은 채로 출항할 수 있었나.
-구조대는 왜 늦게 나타났나.
-생존자 대부분이 한국 해경이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던 민간 어선에 의해 구조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참사 당시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그리고 마지막 질문: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을 내놓아야 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가.

이 중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반세기만에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이룬 한국이란 나라에서 이번 참사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대형 사고 그 이상이다. 사고 이후 서울 도심엔 여전히 노란 추모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경기 안산 초지동에 합동분향소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부모들은 여전히 도심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행인들에게 노란 리본을 나눠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 것이라곤, 희생자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의미로 서울시청에 걸렸던 대형 노란 리본이 철거됐다는 것, 그리고 공연이나 콘서트 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 아직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가 9명이다.

김영오씨는 사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뉴스가 나오면 라디오를 껐고, 선거일에는 특별수당을 받으려고 자진해서 추가근무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랬던 그가 지금은 정치인들에 맞서 시위를 하다가 날마다 경찰에 연행되는 처지가 됐다. 김씨는 “정부가 진실을 들으려 하질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2014년 5월, 박 대통령은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했다.

김씨는 세월호 당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엉망진창이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사고의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 책임 관계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희생자 수와 사고 발생 시점도 발표마다 제각각이었다. 김씨는 지난해 4월16일, 이혼 후 수년간 떨어져 살던 전 부인과 함께 진도를 찾았다. “구조대가 늦게 도착했어요. 다들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요.” 배가 가라앉고도 분명 몇 시간 동안은 아이들에게서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문자 메시지를 받은 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배 안에 갇힌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외쳤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텔레비전에서 승객 대부분이 구조됐다는 속보가 나왔다. 결국 몇 주 후, 한국 언론들은 세월호 보도에 있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해야만 했다.

이후 세월호 선원 일부가 사고 당일 아침 술을 마셨다는 사실, 69세 선장 이준석씨가 배를 제일 먼저 탈출한 무리 중 한 명이란 사실 등이 밝혀졌다. “선내 대기하라”라는 이준석씨의 선내 방송은 결국 학생들에게 사형 선고가 되고 말았다. 지난 2014년 11월, 이씨는 징역 36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선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징역형 등이 선고됐다. 세월호 선사가 수개월동안 화물 과적 경고를 무시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 선사 회장 유병언씨는 종교 지도자였던 데다가 알고 지내는 정치계 고위 인사들이 많았다. 몇 주 뒤, 유씨는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의 죽음도 여전히 수많은 의문에 휩싸여있다. 한 일본 신문은 사고 직후 7시간 동안 박 대통령이 한 ‘지인’과 함께 호텔에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사고 당시 청와대 경내에 있었다고 해명했다. 박 대통령의 행적에 의혹을 제기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기소당했다. 출국 금지 명령도 내려졌다.

김씨는 이뿐만 아니라 세월호 특조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또한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위자들은 2014년 4월부터 줄곧 정부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위원회의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2014년 5월부터 김씨도 청와대와 정부종합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날마다 시위를 했다. 시위를 하기 위해 처음엔 휴가를 냈다가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생계는 시민들과 구호 단체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시위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2014년 7월13일, 김씨는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안좋은 여론을 실감한 적도 있었다. 김씨 앞에서 일부러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일부 언론은 김씨가 16살에 학교를 중퇴했다는 사실이나 이혼 경력까지 문제삼았다. 행인 몇몇은 김씨에게 대놓고 ‘몰래 음식을 먹는 것 아니냐’며 불신을 드러냈다.

2014년 8월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을 찾았을 당시 김영오씨는 매우 수척했다. 그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교황을 꼭 한 번 만나고 싶은 마음에 여벌로 갖고 있던 옷을 꺼냈다. 흰색 바탕에 파란 무늬 반팔 셔츠였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김씨는 교황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교황에게 편지를 건네고 자신의 이마를 교황의 두 손에 댔다.

그로부터 12일 후, 그는 단식 투쟁을 중단했다. 병원에 이송된 후에도 단식을 접지 않던 그가 마음을 바꾼 것은 둘째딸 유나를 위해서였다. 제발 단식을 멈춰달라는 딸 유나를 위해 김씨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반년 후, 성과가 아예 없진 않았다. 부분적으로나마 성과가 있었다. 내용이 부실하단 비판이 일었지만 어쨌든 ‘세월호 후속법’이 제정됐다. 최대 수용량, 안전 기준 등이 더 엄격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선박에만 한정됐다. 지난 4월 초에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고 “특조위가 진상 규명을 위한 독립된 권한을 가지지 못했다. 특조위 출범의 무산은 전적으로 특조위를 무시한 정부의 책임이다”라고 밝혔다. 결국 청와대가 약 40만 미 달러 상당의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유가족에게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많은 학부모들은 이를 거절하며 항의의 뜻으로 삭발 시위를 벌였다. 세월호 참사의 원만한 해결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 정부는 재해 예방 교육과 수영 수업도 의무화했다. 다시는 세월호 대형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안전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잇달았다. 지난 10월 야외 콘서트장에서 환풍구가 무너졌다. 이 사고로 16명이 10m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12월에는 서울 동부의 한 쇼핑센터가 개장한지 얼마 안 되어 임시로 영업을 중단했다. 출입문이 떨어져 이용객을 덮쳤기 때문이다. 이 사고 직전엔 공사현장 인부가 추락사했다. 한편 세월호 구조 작업을 했다가 숨진 이도 7명에 이른다. 김씨는 “안전 문제로 숨진 모든 이들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는 4월15일, 김씨는 보트를 타고 세월호 침몰 현장에 가볼 계획이다. 4월16일에는 유민이와 유민이의 친구들이 졸업하고 싶어했던 학교를 다시 한 번 찾을 것이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또다시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는 참사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유민이가 꿈에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4월16일이 안 왔으면 좋겠어요. 지난 1년간 우리가 이뤄낸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씨가 열여섯살 당시 유민이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는 웃는 얼굴로 딸의 사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알람을 껐다. 정확히 오후 4시16분이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날짜, 4월16일을 의미하는 시각이었다. “이 시간에 많이들 알람을 맞춰놨어요.” 이어서 김씨가 말했다. “죽는 날까지 이 시간에 알람 울리게 해놓으려고요. 이제 제게 남은 것이라곤, 지킬 것이라곤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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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쏘렌 키텔 기자
사진: 박준수
번역: 허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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